자유는 책임을 수반한다. 책임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이다.
- 밑줄 친 내용
1) 우리가 일본에서 만나는 것은 유교라든가 기독교와 같은 명확한 도덕률이 아니라, 어디에도 명확하게 그 주체나 원리가 없는 ‘사회’의 도덕이다. -28p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기’가 없는 것이다. 중심은 ‘사회’고, 그들은 그것을 무서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립을 두려워해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이기주의적인데 ‘자기(ego)'는 없다. -29p
2) 그들은 객관적으로 ‘원인’을 찾고자 하지만 그것은 항상 ‘책임’과 혼동되고 만다. -39p
3) 어떤 사건에 관해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윤리)의 문제이다. 하지만 자연의 영역, 자유의 영역이 따로따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닌 동일한 하나의 내용이 인식의 대상이자 동시에 윤리적인 판단의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53p(제 3의 이율배반)
자유로운 주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따로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주체적이 되라, 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4)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그 것은 도덕적·지적 관심을 배체하는(괄호에 넣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판단할 때 인식적 판단 (참, 거짓), 도덕적 판단(선, 악), 그리고 미적 판단(쾌, 불쾌)라는 세가지 판단을 동시에 한다. -68p
우리는 행위자가 이러한 행위의 결과 계열을 새롭게, 스스로 시작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72p
5)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상뿐이며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은 불가지론이 아니라 인식이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반론을 제기해올지도 모르는 타자 즉, 이쪽이 마음대로 상정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니라 불투명한 타자 즉, '자유로운' 타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89p
6) 세계종교가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이 죄가 무겁다는 인식은 언뜻 심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일 수는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108p
뭐든 오십 보 백보인데, 난 오십 보와 백보는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해. 굉장히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오십 보만큼은 다르지. 그리고 그 다름이라든지 차이라는게 나한테는 결국 절대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선택할 뿐이다. -109p
10) 정치적 책임은 결과에 대한 준엄한 책임이며, 더욱이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 공산당의 입장은 일반 대중과 달리 단순한 피해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방관자도 아니며 가장 능동적인 정치적 적수다.
11) ‘책임’을 제거하는 방향에서의 revisionism이 아닌.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그 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죽은 자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던 ‘타자’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12) 경제적 평등이라든가 풍요로움, 실업문제의 해결 같은 것은 코뮤니즘의 과제가 아니다. 그 정도의 것은 복지국가 혹은 사회민주주의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임노동의 폐기란 바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의 현실적인 형태 (중략) 자연사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니다. 즉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